런던에서 타워 브리지의 의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금문교의 의미와 같다. 누구나 금세 알아볼 수 있는 상징적인 구조물로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기념품점에 가면 티셔츠에서부터 티스푼에 이르기까지 다리 사진이 넘쳐난다. 그런데 미국 서부로 여행을 떠난 관광객들은 대부분 금문교가 현수교인 줄 금세 알아차리지만-사실 세계에서 가장 길고 웅장한 현수교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런던을 찾은 사람들은 대부분 타워 브리지가 어떤 종류의 교량인지 알지 못한다. 사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건설된 워낙 독특한 구조물이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면 종류를 결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남다른 면이 있는 구조물이 대부분 그렇듯 타워 브리지도 특이한 상황에서 설계 · 건설된 작품이었다.
19세기 중반에는 타워 브리지보다 조금 위쪽에 자리한 런던 다리가 템스 강을 오가는 높은 범선의 1차 관문 역할을 했다. 여기에서 몇몇 선박들은 교량 밑에 자리를 잡고 못이라고 불리는 깊은 지점에 닻을 내렸다. 이곳은 강둑이 낮기 때문에 작고 낮은 거룻배로 짐을 싣고 부릴 수 있었다. 그때에도 런던 브리지는 지금처럼 세인트캐서린 선창 옆, 지면이 자연적으로 솟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그레이터런던(런던 시를 중심으로 한 대도시권-옮긴이)이 발전하자 교량을 추가로 건설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예전부터 병목이었던 런던 브리지는 이제 참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조금 더 아래쪽이 알맞은 부지로 선정됐다. 재정적인 부분은 13세기에 런던 브리지 통행료를 걷어 유지비로 모아두었던 브리지 하우스 에스테이츠 트러스트 덕분에 문제없었다. 이 넉넉한 자금이 런던 브리지 너머의 교통문제를 개선하는 데 쓰이게 된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템스 강을 가로지르는 교량을 설계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구조적인 이유보다는 이 지역 특유의 역사, 지형, 무역상의 장애 때문이었다. 새로운 교량의 북쪽 진입로는 자연스럽게 런던 탑과 강둑이 낮은 세인트캐서린 선창 사이로 결정됐다. 선박 통행에 지장이 없으려면 다리를 높게 짓거나 개폐식 경간을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교량을 높게 지으려면 진입로가 길어야 하고, 진입로가 길어지면 런던 탑 옆에 보기 싫은 구조물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비용이 늘어났다. 반면 교량 중앙에 개폐식 경간을 달면 양쪽 경간을 강에 바짝 붙여서 지을 수 있고 따라서 진입로를 최대한 짧게 줄일 수 있었다.
모든 공사가 그렇겠지만 교량설계도 조건의 제한을 많이 받는다. 조건과 타협을 하다보면 처음 스케치와 최종 결과물이 대부분 달라지는데, 타워 브리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초기 설계 단계에서는 필라델피아의 델라웨어 강에서 제안됐던 것처럼 도로를 둘로 나눠 개폐식 경간에 따르는 차량 통제의 불편함을 해소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교각 사이 조그만 공간에서 선박을 통제하려다 자칫 잘못하면 어떻게 될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에 이 의견은 폐기처분됐다.
타워 브리지의 지금 모습은 1880년대에 공학자 존 울프 배리가 설계한 것이다. 그는 템스 강 어귀의 사우스엔드 부두, 배리 철도회사가 웨일스 남부에서 석탄을 들여올 때 쓰는 카디프 인근의 배리 선창 등 여러 부두와 선창 사업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배리는 타워 브리지를 완성하고 얼마 안 있어 기사 작위를 받고 토목기사협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숱한 비난에 시달리다 얻은 영광이었다.
의회의 승인이 떨어지자 타워 브리지 건설은 1886년, 강 중간에 기초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상부구조를 얹고 분주한 차량 통행이 시작됐을 때 지반 침하가 심각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에 준비단계에서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강바닥의 진흙이 하중을 어느 정도 버티는지 판단하는 것이었다. 실험을 위해 투입된 실린더는 1제곱피트(약 0.03평)당 6.5톤의 하중을 받았을 때부터 진흙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최대 하중이 1제곱피트당 4톤으로 조심스럽게 책정됐고, 이즈음 설계가 완성된 상부구조의 하중을 감안해 기초의 규모를 결정했다. 기초의 규모는 당시 공학계에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몇년 전에 완공된 브루클린교에 이어 두 번째로 컸던 것이다.
다음 차례는 총하중을 감당할 수 있도록 강바닥을 파내는 작업이었고, 이 작업을 진행하려면 공사 도중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잠함과 물막이를 건설해야 했다. 둥그렇고 촘촘하게 말뚝을 박아 만드는 물막이는 그 역사가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브루클린쿄의 기반 공사 때도 쓰였던 공기 잠함은 위가 뚫린 대형 상자를 강물 속에 거꾸로 빠뜨려 공기로 가득한 공간을 만들고, 잠함이 원하는 만큼 가라앉을 때까지 인부들이 이 안에서 바닥을 파는데 필요한 도구이다. 타워 브리지에 쓰인 잠함은 완전 밀폐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압축 공기로 인한 위험이 없었다.
강 중류에 타워 브리지의 기반을 건설하는 데 28제곱피트(약 0.8평)의 잠함 8개가 동원됐고, 교각 끝을 뾰족하게 만드는 용도로 삼각형 모양의 잠함 4개가 쓰였다. 강바닥에서 각 잠함이 수평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사이에 0.6~0.9m의 공간을 두었고, 여기에 말뚝을 박아 물막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잠함이 목표 깊이에 도달하면 안을 콘크리트로 채우고 이 위에 벽돌을 쌓아 철제와 목재 구조의 받침으로 쓰일 예정이었다. 미국의 잡지 《엔지니어링 뉴스》에서는 건설 계획을 소개하면서 잠함이 강철로 만들어졌다는 데 주목했다. 타워 브리지에 강철 잠함이 쓰인 이유는 "영국에서 적합한 목재를 구입하려면 비용이 많이 든다"면서 목재 잠함을 금지시킨 의회 때문이었다.
《엔지니어링 뉴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강바닥의 진흙을 파내고 잠함이 밑으로 조금씩 가라앉는 동안 밀물이 닥치면 이 공간에 물이 차기 때문에 물을 퍼내느라 "밀물 중간에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이 2~6시간밖에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물막이에 쓰인 여러 강출 부재의 크기를 "잘못 설정한 데서 비롯된 어이없는 실책" 인데, 《엔지니어링 뉴스》에서는 이대로 계속 공사가 강행된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사실 공사가 강행된 이유는 잘못 제작된 물막이를 다시 만드는 비용보다 밀물이 빠질 때마다 물을 퍼내는 비용이 덜 들기 때문이었다. 또 한편으로 《엔지니어링 뉴스》에서는 2개의 주 교각을 건설하는 데 4년 이상 걸린 점을 꼬집으면서-"공사 속도가 너무 느리다" 고 했다 - 테네시 주의 멤피스와 뉴욕 주의 포킵스를 비롯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몇몇 교량 건설 사업을 언급했다.
그러나 상부구조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하부구조는 보통 잊혀지기 마련이고, 타워 브리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현수형 좌우 경간과 두 개의 고층 보도교를 갖춘 쌍판 도개 구조"라고 표현된 상부구조 공사는 교탑용 철골 건립에서 시작됐다. 철골은 4층 빌딩 높이였고, 여기에 표면이 거친 화강암을 입혀 인근 런던 탑과 비슷한 분위기의 교탑이 완성됐다.
건축가 호레이스 존스가 고안한 빅토리아 고딕 양식의 교탑은 지금까지도 숱한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아직까지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내력 철골에 돌을 입히겠다는 발상은 몇 십 년 전 조지 워싱턴교 때 이미 등장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 말기 비평가 중에서도 가장 앞장을 섰던 H. 히스코트 스테이섬은 영국왕립건축가 협회의 회원으로, 「토목공사의 건축적 요소」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워브리지는···(중략)···싸구려 허식과 실질적인 구조의 왜곡이라는 폐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조물이다.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어느 무명의 설계자가 고안안 외관이라는데, 내가 보기에는 주위에서 가끔 접하는 광고 - "지금 당장 제도의 달인이 되고 싶습니까? 그럼 고딕 양식의 전문가가 되십시오!" - 의 결과물이자 제도공의 작품으로 느껴진다. 지나치게 묵직한 현수 체인이 달려 있는데 어째서 쓰러지지 않을까 싶은 장식용 석조물, 겉보기에 튼튼한데도 옆 벽을 쇠로 만든 구조물에 의지한 교탑, 밑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보도교······. 건축가라면 누구나 이런 엉터리보다 단순한 철골 구조가 낫다고 할 것이다.
J.A.I 와델은 1916년에 두툼한 논문 「교량공학」을 출간했을 때 설계의 예술적인 측면을 다룬 장에서 이 구절을 인용했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영국 여행길에 나선 미국 공학자라면 반드시 타워 브리지에 들러 이 나라에서는 설계의 만용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 효율성이라는 중요한 요소가 어느 정도로 무시됐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나 와델도 타워 브리지와 비슷한 시기에 시카고 강에 연직강하식의 홀스테드 스트리트교를 건설했을 때 혁신적이지만 효율성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멋이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대부분의 교량을 옭아매는 물리적 · 정치적 한계를 알지 못하면 누구나 겉모습만 가지고 쉽게 왈가왈부하는 법이다.
사실 타워 브리지의 석조 교탑에 달린 '체인'은 리벳으로 단단하게 연결한 초승달 모양의 거대한 트러스였다. 트러스와 연결된 현수 경간은 길이가 각각 82m로, 비슷한 시기에 건설된 브루클린교의 중앙 경간이 486m인 것에 비하면 평범한 수준이었다. 타워 브리지가 트러스 현수식으로 건설된 것은 영국 특유의 바람걱정 때문이었다. 1830년대에 메나이교와 브라이턴 부두의 현수 상판이 바람에 날아간 사건, 최근 테이교의 거더가 교각에서 떨어져 물 속으로 빠진 사건도 우려의 분위기를 부채질했다. 타워 브리지가 설계 단계일 때 건설 중이던 포스교는 521m 간격을 두고 우뚝 서 있는 철제 교탑에 버팀쇠로 떠받친 육중한 캔틸레버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바람 문제를 해결했다. 따라서 타워 브리지의 트러스 체인은 당시 영국의 분위기를 반영한 도구라고 볼 수 있었다(1877년 머난거힐라 강에 놓인 피츠버그의 포인트교와 1880년대 후반에 구스타브 린든솔이 허드슨 강에서 제안했던 914m 길이의 현수교 등 훨씬 나중에 건설된 유명한 교량들은 케이블이나 체인보다 타워 브리지처럼 뻣뻣한 현수 장치를 대거 선택했다).
고정 경간이 특별히 길다고 볼 수 없는 타워 브리지의 특징은 개폐식 중앙 경간이다. 도개교는 일대의 중세 성 분위기와 어울렸지만, 의회에서 관리하는 61m 너비의 선로에는 완력으로 체인을 잡아당겨 들어올리는 전형적인 형식이 맞지 않았다. 반면에 개폐식 상판에 평형추가 달린 도개교는 들고 내릴 때 비교적 힘이 덜 들었다.
와델은 높고 볼품없는 승개교를 좋아했지만, 대도시에는 도개교가 더 알맞았다. 특유의 디자인이 거대한 평형추와 작동에 필요한 장치를 가려 상판이 움직이지 않는 한 도개교인 줄 모를만큼 감쪽같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32년 무렵 알링턴 국립묘지와 링컨 기념관 사이에 건설된 알링턴 기념교는 워싱턴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량으로 손꼽히는데, 돌을 입힌 우아한 콘크리트 아치 사이에 강철로 만든 도개 경간이 교묘하게 감춰져 있다. 그러나 후기 빅토리아 여왕 시대 런던에서는 타워 브리지 규모의 도개교가 새로운 개념이었고, 구조가 아닌 기계 장치에 많은 공학자들의 관심이 쏠렸다.
100톤짜리 도개 상판 위에 놓인 길이 30m, 너비 15m의 도로에서 차량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요철 예방이 필수였고, 이 때문에 타워 브리지는 상당한 규모의 기반이 필요했다. 도개 상판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동력은 360마력의 증기 기관 2개가 맡았다. 증기 기관이 축압기에 든 물을 6.4㎠당 386kg으로 압축하면 수압으로 인해 회전식 수력 기관이 돌아가고, 이것이 다시 도개 상판을 올리고 내리는 전동 장치의 작동으로 이어지는 방식이었다. 부품 하나가 고장 나더라도 교량 작동에 문제가 없도록 모든 장치는 2개씩 설치됐다. 처음으로 시범 작동했을 때를 제외하면 시스템이 말썽을 일으킨 적이 없다지만, 소문에 따르면 1968년의 어느 더운 여름날 찜통더위 때문에 고장 난 적이 있다고 한다.
도개교 작동에 필요한 1차 동력원은 서리 쪽(남쪽) 교대에 설치됐고, 수압은 보도교에 묻힌 관을 통해 미들섹스 쪽(북쪽) 교각으로 전달됐다. 그러나 교탑 사이에 고층 거더를 만든 이유가 수압관 때문은 아니었다. 수압관이라면 교량의 어느 한쪽에 만들어도 상관없었다. 교탑의 강철 골조에 캔틸레버 식으로 높직하게 보도교를 건설한 이유는 의회에서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공사 도중 비계 설치에 반대했기 때문인데, 덕분에 현수 트러스가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겨도 벌어지지 않도록 교각 사이를 연결한 구조물이 감쪽같이 가려졌다. 그리고 도개 상판이 들릴 때에도 보행자는 고량을 건너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1894년 6월 30일, 황태자가 참석한 가운데 공식 개통식이 열린 직후부터 날마다 7만 명의 보행자와 8000대의 전차가 타워 브리지를 이용했다. 도개 상판은 하루에도 최고 스무 번씩 열렸다 닫혔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근 선창의 활용도와 타워 브리지 밑을 지나가는 높은 선박의 숫자가 줄어들자 도개 상판이 움직이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이제는 어쩌다 한 번씩 도개 상판이 열리면 날마다 교량을 이용하는 자동차, 택시, 버스, 트럭 운전자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차량의 소통이 원활해지자 활용도가 낮아진 43m 높이의 보도교는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유리로 덮였지만, 교량 전체가 박물관으로 선포되면서 1980년대에 다시 개통됐다. 어쩌다 한 번씩 쓰이는 도개 장치는 전기식으로 바뀌었지만, 서리 쪽 교대에 원래 증기 장치 일부가 깔끔하게 보관돼 있다.
과거 수십 년 동안에는 템스 강으로 들어서는 선박이 제일 처음 마주치는 구조물이 타워 브리지였다. 하지만 1991년 무렵 강 하류 쪽으로 32km 떨어져 있는 다트퍼드에 새로운 사장교가 건설되면서 이 자리를 내주게 됐다. 공식 명칭이 엘리자베스 2세교인 이 고층 교량은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빠져나가려는 차량을 수용하기 위해 건설됐다. 덕분에 상습 정체에 시달리던 다트퍼드의 터널은 북쪽으로 향하는 차량만 상대하면서 한시름 덜었다. 사실 템스 강으로 들어서는 선박이 제일 처음 마주치는 진정한 장애물은 템스 강 수문이다. 1984년 무렵 그리니치 근처에 건설된 이 독특한 수문은 템스 강 양안을 가로지르며 너비가 61m에 달하는 10개의 개폐식 갑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갑문은 선박이 접근하면 강바닥으로 모습을 감추고, 북해에서 유입된 물이 상류의 대도시를 위협하면 수력 기계의 힘을 빌려 위로 올라간다. 그러나 수많은 수문과 교량이 템스 강을 가로질러 건설된다고 해도 인지도와 인기 면에서 독특한 공법과 구조를 갖춘 타워 브리지를 따라잡을 경쟁자는 없을 것이다.
출처 : 《기술의 한계를 넘어》 -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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